“악의 평범성과 모호성”

유태인이며 정치철학자요, 평론가였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예루살렘의 아히히만(Eichmann In Jerusalem)’이란 책을 저술하면서 독일나치의 잔혹함을 알리려 하였다. 아히히만은 2차대전 당시 홀로코스트(Holocaust:대학살)의 전범으로 유태인 학살 사건에 가담한 자이다. 그는 전쟁후 남미로 도피하였으나 파라과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되었다. 사실, 아히히만은 숨어 있는 유태인들을 보호해 준적이 있다. 그는 평소 유태인에 대해 반감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유태인들 중에는 “나는 아히히만 때문에 살았다.”고 말한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극악무도한 유태인 대학살의 주범이 되었는가.
한나 아렌트는 그가 재판 받는 법정에 참석하여 그의 말을 기록하였는데 그는 항변하기를 “나는 군인으로서 복종했을 뿐, 안했으면 군사재판으로 죽었다.”라고 하였다. 아히히만의 항변과 성품을 한참 듣고 목격한 후, 한나 아렌트는 책에 이렇게 썼다. “아히히만이 인간말종인 줄 알았더니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한 가정의 착실한 가장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히히만의 엄청난 죄악의 뒤에는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감과 가정을 보호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는 분명 전쟁의 흉악범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선한 인간이었다.
선과 악의 공존은 세상 역사는 물론, 사회와 한 개인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 과연 선을 위해서 자신과 가정을 철저히 희생할 수 있는가. 국가나 회사에서, 또는 어느 단체에 종사하면서 상부의 부당한 지시가 있을 때 그것을 거부하고 모든 생존권을 포기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매사에 그럴 수 있다고 누가 과연 장담할 수 있는가. 한나 아렌트는 현실적이면서 객관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나도 그랬을 것”이라고 말이다.
세상에는 악을 외면하고 선을 위해 완벽히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때로는 선과 악의 기준과 그 경계선을 긋기가 모호할 때가 많다. 그 경계선은 시대와 상황과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의 전쟁 영웅이 후에 민족의 모반자가 되어 처형되기도 한다. 역사와 인물에 대한 해석적 각도에 따라 행운과 불운, 민족의 구원자와 매국노로 나누기도 한다. 우리 주변의 어느 공동체 속에는 선을 행함 속에 숨겨진 악이 존재할 때가 있고, 악 속에서도 선이 있을 수 있다.
교회도 그렇지 아니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의 의와 선을 위해 존재하지 않던가. 그러나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불의가 존재하는가. 큰덩어리의 불의보다 사소하고 보이지 않는 불의 말이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것이지, 교회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교인 개개인에게는 많은 약점들이 있다. 바울의 고백처럼, 선과 악이 내 안에 있다. 그 선과 악은 어쩌면 뒤엉켜서 나로 하여금 사망의 길로 가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90%의 선이 아닌, 10%의 악이 나를 패망시키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악의 평범성과 모호성이 인간 사회를 분열시키고 절망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진가를 발견한다. 기독교 복음은 그 선과 악의 기준의 모호성과 평범성을 뛰어넘는 ‘은혜’를 선포한다. 우리의 무지로 행하는 모든 악과 불의를 묻지 않는다. 선과 악의 모호성에서 자유케 한다. 그리스도인은 악을 저버리고 선을 추구하되 선과 악의 얽힘 속에 종속되거나 패망하는 죄인으로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면, 치우친 해석의 각도에 따라 역사나 개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이 국민에게 평가절하되어 지탄을 받더라도 신앙인은 그의 공헌과 기여도를 참작하고 은혜와 이해로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 또한 악의 평범성과 모호성 때문에 그를 흑백논리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그런 삶의 자리에 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모호한 지식과 삶의 패턴에서 오직 필요한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사랑 아닐까.

미래에 대한 신학적 조명

요즘같이 미래에 대해 불투명한 시기는 일찌기 없었다. 갖가지 재난과 사고, 역병 등이 창궐하는 때에 개인은 물론, 사회와 나라가 예단하기 어려운 미래로 인해 암울한 운명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실이다. 누구나 관심을 갖는 것은 ‘과연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것이다. 그 미래를 알기 위해 사회학자, 미래학자, 심지어 점술가에 의지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단지 기관차에 끌려가는 객차와 같은 수동적 삶으로 여겨진다.
인생의 궤도선상에는 운명론과 인과론으로 나눌 수 있다. 말 그대로 운명론, 즉 숙명론은 인간의 행동여하에 관계없이 이미 결정된 궤도를 걷고 있다는 신념이다. 인과론은 원인이 바뀌면 결과도 바뀐다는 능동적인 개념이 있다. 두 관점에 따라 인생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다. 자신에 대한 해석도 과거에 대한 두가지 해석에 따라 현저히 다를 것이다.
필자는 성서에 나타난 역사이해를 살핌으로써 우리의 과거를 조망해보고 미래를 예견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이 담론을 언급하고 있다. 성서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어나가지만, 그 역사는 세계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미래를 판단하는 데에 귀중한 잣대가 되고 있다. 성서는 우리에게 역사의 반복이라는 하나의 유형론(Typology)적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의식이란 역사를 보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이것이 예언이고 미래의 운명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리라.
성서에 나타난 역사이해는 당연히 예언자들에 의해 조명이 되고 있다. 예언자들은 역사의 컨텍스트(Context)에 따라 예언의 성격도 달리 하였는데, 그 두 가지가 묵시적 메시지(Apocalyptic Message)와 예언자적 메시지(Prophetic Message)이다. 사회적 암울함과 임박한 전쟁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끝날 것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예언자들은 묵시적 메시지를, 이스라엘의 역사선상에서 낙관적인 사관을 가진 예언자들은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전자는 현재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를 알리는데에 주력했는데, 한마디로 인간이 변동할 수 없는 ‘닫혀진 미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후자는 심판을 넘어선 희망이 역사선상에서 이루어지며 ‘열려진 미래’로서 다분히 인간의 행동여하를 묻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성서적 역사관은 무엇인가? ‘닫혀진 미래’와 ‘열려진 미래’가 함께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이나 사회, 민족이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함께 굴러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생 속에 의지대로 되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실패와 질병 속에 살 수 밖에 없으며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이 무엇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닫혀진 미래’의 길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갖게 된다. 코로나 사태를 보라. 막을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재앙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지 않는가. 신앙인은 예단할 수 없는 거대한 미래 앞에서 그 분을 고백하고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이 역사선상을 넘는 새로운 세계를 위해 개입하시는 ‘닫혀진 미래’앞에 우리의 의지와 계획을 내려놔야 한다. 미래는 우리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열려진 미래’를 주신 것도 기억하라. 변할 수 없는 역사의 궤도의 길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의지에 따라 미래를 바꾸시는 상황을 또한 허락하신다. 미래를 알 수 없을 때 지금 자신의 태도를 보라. 과거에 그랬듯이, 현재 나의 삶의 태도는 곧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뜻에 따라 하나님은 미래를 좌우하신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신앙인의 소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순종하고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사고와 신앙에 따라 미래를 바꾸어나갈 수 있다는 인식이다. 믿음은 인식이다. 하나님이 성서에 기록하신 인간의 역사의 순리를 인지하고 지금과 미래의 나를 볼 수 있는 지혜이다.
코로나 사태에 우리 모두 소망을 갖게 되길 바란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가면서도 우리의 신앙에 따라 우리의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신념 말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는 현재의 불운한 기운이 문제가 아니다. 그 분의 눈의 초점은 자녀인 우리에게 있다. 우리의 자세가 미래를 바꾼다. 창조적인 삶이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를 묵묵히 이겨내는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변화”와 “변함”에 대한 제언

요즘 “변화는 있고 변함은 없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변화(Transformation)와 변함(Changing)이란 단어는 사물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시각에 따라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의 개념을 갖고 있다. 모든 자연은 계절에 따라 색깔과 풍경이 변화한다. 변화는 그 기후에 따라 적응하며 생존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속성과 본질은 변함이 없다. 그러기에 변화가 있는 것은 순리이지만 변함이 있다면 역리요, 모든 질서의 역행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스스로 변함을 택하므로 결국 죄에 빠진 운명으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변화되어야 한다. 변화는 있고 변함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삶으로 변화하면서 변함이 없는 삶을 이룰 수는 없을까. 꾸준한 변화가 없다면 결국 변함이 있는 신앙인이 되고 만다. 다시말해 신앙성숙이란 무엇인가. 변함이 없도록 변화하는 것이다.
필자가 사역을 해오면서 많은 교회가 갖고 있는 맹점과 신학적, 행동적 오류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 것은 한마디로 변화를 억제하는 신학적 기류와 신앙관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한번 얻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계속적인 변화의 삶이 무시된다면 성경에 나타난 은혜로 받은 구원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는 말씀은 현재진행형의 의미이다. 이미 얻은 구원과 지금 얻고 있는 구원, 앞으로 얻을 구원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앙인은 변함없는 구원을 위해 변화되어 나가야 한다. 삶의 계속적인 변화가 없다면 이미 얻었다고 하는 구원에 대해 변함이 없는가를 한번 의심해보라.
독자는 자신이 이미 구원얻은 하나님의 자녀로 믿는가. 그렇다면 교회의 직책이나 사회의 직분자로 사는 데에 몰두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은 사회의 성공을 위해 직책에 혈안이 되어있지 않은가. 직책을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려 한다. 신앙인도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지고 신앙의 척도로 삼으려 한다면 그 직분이 구원의 믿음을 조롱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목사나 장로, 집사 권사를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셨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직분이나 사회의 타이틀 이전에 하나님이 빚으신 사람으로 살라는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 계속적으로 변화하라. 가시적이고 환경적인 변화가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자신으로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변함없는 변화는 이미 얻은 구원의 신앙과 함께 구원을 날마다 체험하는, 즉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구원이 임하는 과정의 삶의 표현이다.
결론적으로 변화가 있어야 변함이 없다. 중단없는 변화야말로 교회를 혁신하는 것이며, 자신 뿐 아니라 가정, 사회가 살 맛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정치적 개혁, 경제부흥, 잘 짜여진 사회보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의 변화에서 온다. 주변에 사람답게 사는 모습들에서 느껴진다. 이것이 우리모두를 위한 변화의 필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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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 행동을 조절하라”

지난 20C 정신분석학의 초석을 놓았던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Freud)는 <꿈의 해석>,<히스테리 연구> 등, 그의 저술에서 임상실험을 통한 인간의 무의식 세계의 비중을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그의 연구는 오늘날 정신분석학에 주요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간의 행동과 말, 꿈, 감정 등이 프로이트의 말처럼 대체로 무의식에서 오는 것이라면, 인간의 운명도 무의식이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살아오면서 본인 뿐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어떤 역동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음을 인지해 왔다. 그 역동이란 예를 들면, 히스테리 현상, 강박증, 정신분열 현상 같은 것들이다. 이런 현상들은 망각, 공포, 대인기피증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신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1950년대에 출판된 프로이트의 책에서는 정신질환적 병리현상들을 과학적인 연구,즉 뇌의 연구를 통해 치료를 연구한 바가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총괄된 정신질환연구의 뿌리는 바로 ‘무의식’에 대한 것이다. 무의식은 어렸을 때부터 겪은 경험에서 온다. 무의식 작용이 제일 원활한 때가 꿈을 꿀 때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융(Carl Jung)도 꿈에서의 무의식 활동을 연구하였다. 그는 말하길, “꿈은 무의식과 이어지며 어떤 보상작용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도 언급하길, “꿈은 숙제에서도 오며, 그 숙제는 무의식을 자료로 삼는다.”고 말한다.
숙제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성취하지 못해 늘 고민거리가 된 어떤 무엇이다. 예를 들어 젊었을 때 사업에 실패하고 그것이 한으로 남아있는 사람은 그 한이 무의식에 남아 꿈으로 사업성공을 이루려고 한다. 사업에 성공하는 꿈을 꿀 때도 있지만, 때로는 사업실패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온갖 변형된 현상으로 무의식과 꿈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나쁜 감정이 묻어있는 무의식에 의해 사람의 의식은 물론, 평상시의 말과 행동, 감정이 비상식적인 현상으로 돌출되는 것이다.
오늘날 정신의학자들에 의하면 보통 대화할 때나 쇼핑할 때, 또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심지어 판사가 판결할 때도 무의식이 그 사람의 결정에 때로 80%정도의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갑자기 튀어오르는 상한 감정, 기억은 없어도 왠지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불쾌한 기분은 거의 과거의 좋지않은 경험과 그에 따른 무의식 때문이다. 사실 이런 상한 무의식이 그 사람의 대인관계와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필자가 무의식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신앙이나 모든 생활 속에서 지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을 보라.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말 속에는 그 사람이 본래 의도하지 않은 현상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 현상들이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고 분쟁을 일으키며 본인도 불행해지는 사례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치유의 출발점은 그 본질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는 것은 현상만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선 자신을 치유해나가도록 해야 한다. 먼저, 자신의 행동과 말이 상대방과 공동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거나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면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라. 자신의 어떤 무의식의 감정이 있는지 말이다. 그것은 자유연상을 통해 가능하다. 자유연상이란 나쁜 감정을 추적해가는 것이다. 떠오르는 단어들을 적어보라. 둘째,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부정적 감정이 어떤 경험에서 왔는지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나쁜 기억을 긍정적인 기억으로 바꾸라. 예를 들면, 부모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있다면 부모를 이해하도록 하고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경험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라. 셋째, 평소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낼 때 한번 템포를 늦추라. 과연 이 말이 상식적이고 옳은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감정에 의한 즉각적인 말과 행동은 좋지 않은 무의식 작용이 많기에 실수가 다반사이다. 넷째, 자아상 안에 있는 나쁜 이미지보다 좋은 이미지를 많이 심도록 노력하라. 자신의 장점과 좋은 경험들, 어려움 속에서 견뎌온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 그리고 상처많은 자신을 보듬어주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의식적 노력이 무의식을 바꿀 수 있다. 좋은 무의식은 보존하되, 안좋은 무의식은 언제든지 신앙과 노력으로 변화가 가능하다. 그래야 행복해진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 그래야 이웃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이 생기고 자신은 평안을 경험할 것이다.

“행복한 부부가 되려면”

존 그래이(John Gray)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이 책 내용은 남성과 여성, 특히 부부가 얼마나 다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이 책이 아니더라도 결혼한 사람이면 배우자가 자신과 얼마나 다른지를 경험하며 산다. 부부생활에 있어서 어려운 점은 ‘서로 너무 다르다’라는 것이다.
첫째, 성장배경과 타고난 성향이 다르다. 둘째,출생서열이 달라서 배우자를 습득된 행동으로 대하려고 한다. 셋째,가치관이 다르다. 넷째,성에 관한 관점이 다르다. 다섯째,경제적 관점이 다르다. 이 밖에 부부가 서로 기질과 성격이 너무 달라서 마치 외계인과 함께 사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필자는 아내와 성격이 매우 다르다. 필자는 세심한 편이고 아내는 좀 무딘 성격이다. 필자는 성격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그것을 보는 아내는 질식할 것 같은 표현을 보인다.
필자가 느끼는 아내의 성격도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서로가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다. 다르기 때문에 부부는 얼마나 인내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도 암담한 것은 생을 마칠 때까지 그 다른 점과 도저히 접촉점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찌로다(창2:24).”라고 설파한다. 다른 점이 많아 마찰이 있는 부부가 어찌 한몸, 한뜻으로 살아간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다. 서로 다른 부부가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하나로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사랑 밖에는 없다. 기독교의 사랑은 다른 것을 같게 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끼리 있는 그대로 어우러져서 하나의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의 부부사랑이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배우자의 다른 점을 나에게 맞게 바꾸려 하지 말라.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배우자의 다른 점을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다른 점이 나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는 유익이 된다고 믿는다. 부부사이가 돕는 베필이라면 서로 사생활,취미 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부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보여준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대할 때 주께 대하듯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며 부부 사이의 헛점과 실수를 용해시켜버린다.
배우자에 대해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배우자가 어떤 상처를 갖고 있으며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배우자가 가끔 나에게 버럭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일 때 대부분은 궁극적으로 나에 대한 불만이 아니다. 그 현상 뒤에 있는 본질을 봐야 한다. 배우자의 심령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삶의 애환과 트라우마를 보도록 노력하라.
결혼생활을 행복을 위해 했던가. 그런데 많은 경우 행복을 못 느끼는 이유는 첫 단추가 잘못 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단추란 바로 자신과 배우자에 대한 비중이다. 배우자에게 먼저 비중을 두라. 배우자의 행복을 위해 부부생활을 하라. 그러면 자신에게도 행복이 온다는 이 원칙은 성경의 진리이다.
배우자와 대화할 때, 먼저 눈을 보라. 눈은 말과 행동보다 그 사람의 진실을 확연히 보여준다. 배우자가 무슨 의도로 얘기하는지, 무엇이 힘들어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눈을 보면 안다. 그리고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말의 억양, 감정조절을 먼저 생각하라. 격앙된 말투 한마디는 배우자에게 평생 상처를 심어줄 수 있고 그것은 본인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부부는 다르면서도 한 인생을 같이 산다. 부부가 두 인생을 산다면 이미 부부가 아니다. 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가치관의 조화를 말한다. 서로 다른 곳에 있고 다른 일을 할찌라도 가치관과 삶의 방향이 같다면 한 삶을 사는 것이다. 특히 한 신앙을 갖기를 바란다. 신앙이야말로 부부의 다른 점들을 하나의 의미로 엮어줄 수 있는 원동력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 흠이 없거나 같아서가 아니다. 서로 부족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배려요, 희생이며 이해하는 것이다. 부부가 살아야 가정이 살고, 자녀,교회가 사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적 희망의 초석이다.
지금 배우자를 보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신 또 다른 나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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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이해”

“역사관은 편견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역사기록이 정치적 승자의 기록이기에 후세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오도할 수 있다는 말일게다. 역사적 사실을 올바로 기록했다 해도, 그 사실을 잘못 해석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현세에서도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전문가가 아니라면, 많은 편견과 오해를 가질 수 있다. 하나의 팩트(Fact)가 사람의 삶의 배경,사고의 틀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존중해야 하되, 본래의 의미를 벗어난 다양성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이질감과 갈등을 일으킨다.
편견은 정확한 사고와 이성적 논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착화된 무의식과 상대방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돌출된 것이며, 다수의 정형화된 사고의 틀에 지배받는 경우에 나타난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들이 그럴 수 있으며 그 편견을 평생 진리로 사수하며 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편견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그르치게 하고 대인관계를 원만치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잘못된 운명으로 이끌기도 한다.
가령, 국군의 날이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낙하 전에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리면 낙하할 때 죽을 수도 있다는 징크스가 있다. 그럴 때는 대개 열외시켜 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열외 없기를 명령받았는데, 한 공수부대원이 숟가락을 떨어뜨린 것이다. 설마라는 생각으로 비행기에 올라 낙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원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겁에 질려 차고 뛰어내리지 못한 결과, 프로펠러에 끼어서 사망하였다. 이 사람을 죽게 한것은 숟가락을 떨어뜨렸기 때문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노인문제를 생각해보자. 흔히 “노인들은 무능력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노인에게 일자리를 안주면 무능력해진다. 흔히 자녀들이 그렇게 만든다. “부모에게 일시키면 남들이 나를 뭐라 할까?”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또 한 예는 제주도 사람들은 투박하고 억센 사투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제주도는 바람이 세게 불기 때문에 억센 억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역감정도 그와 유사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편견을 이해로 바꾸려면, 자아개념(Self-Concept)이 필요하다. 자아개념이란 자신의 특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체제화(System)된 내적, 개인적 생각이다. 다시 말해 주체성있게 자신에 대한 관점을 갖는 것이다. 옳바른 이해는 사회의 다양성을 고려하면서도 주관적이고 독창적인 관점을 갖을 때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아에 대한 인식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은 신앙의 눈 안에서 자아개념을 가져야 한다. 요9장에 나오는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냐?”고 제자들이 던진 질문은 일반적인 생각, 즉 편견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눈(차원)에서 해석하셨다. 욥에 대해 편견을 가졌던 세 친구들도 하나님의 눈에 의하여 지적을 받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사물과 상황을 볼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믿음이다.
편견을 이해로 바꾸기 위해서는 첫째, 장기적이고 긴밀한 사고의 훈련이 요구된다. 상대방을 충분히 사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해 절대 평가하지 말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많은 시간의 훈련과 깊은 연구, 총체적인 경험 없이는 편견을 없애나갈 수 없다. 둘째, 상호협력적이고 의존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방과 공감할 수 있는 제 3의 문제를 놓고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지라.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짜맞추고 협력하는 시간들을 가지라. 서로 생각을 맞추다보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셋째, 동등한 위치에 서라. 부모와 자녀, 선생과 제자, 학력과 나이, 인종에 대한 차별를 갖는다면 절대 편견에서 자유할 수 없다. 선지식이 편견을 가져올 수 있으니, 상대방의 의견과 나의 의견을 동급으로 생각하라.
사회의 모든 갈등은 편견에서 많이 비롯되지 않던가. 이해하고 공감하며 다양성 속에서도 순응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자아개념을 가진 성숙된 신앙인이 될 것이다.

“목회상담적 설교의 필요성”

2005년 9월 18일¸ 100주년 기념관에서 <기독교사상>주최로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는 주제로 심포지움이 열렸는데, 이 때 여러 대학 교수들은 한국의 저명한 설교자 16인의 설교를 분석하였다. 이 내용들 중, 부정적인 요소들 중에서“개인의 욕망 채우기,”“설교로 포장된 이데올로기 주입,” “오도된 역사인식 주입,” “엘리트 주의”등, 권위적이고 지시적인 패턴의 설교에 대해 지적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민 교회 설교자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는 일방적인 지시형 설교 패턴과 신학과 교회부흥 운동에 필요한 설교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설교 유형은 필요하다. 하지만 한가지 영양부족이 몸 전체의 건강을 해치듯, 편중된 형식의 설교는 청중에게 진정한 치유와 신앙을 심어주지 못할 것임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필자가 목회상담적 설교에 대한 담론을 거론하는 이유는 설교자가 성경의 Context를 통해 청중의 Context에 대한 재해석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설교를 통해서 청중의 경험에 의한 그들의 감정,사고,상처 등이 성경과 공감을 이루고 그 공감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청중은 설교와 자신의 영적,정서적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가로 유명한 포시딕(Harry E. Fosidick) 목사는 “나의 목회의 핵심은 설교라기보다 상담이다. 나의 설교는 집단상담이다. 모든 설교는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과 깊이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심리적으로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의 문제 속으로 파고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목회상담적 설교는 전인 치유를 위해 매우 필요한 것이다. 상담으로 교인들에게 다가가는 설교는 그들의 욕구를 영적, 정신적으로 채워줄 수 있다. 나아가 머슬로우(A. Maslow)가 말하는 최고 상부 단계인 자아실현까지 성취할 수 있도록 해준다.

목회상담적 설교는 교인들의 Context 속에 Text를 적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게 하며 성경 속에 나타난 Context를 공감하도록 하는 효과를 낳게 한다. 이는 하나님과 이웃(사회), 나(영,혼,몸)를 만나고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전인 치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청중의 필요와 아픔을 알아야 하고 그들의 정황(Sitz im Leben)을 파악해야 하며, 그 이해를 가지고 성서의 텍스트를 전할 때 성육신의 설교가 될 수 있다. 목회상담적 설교는 개인상담과 유사한 특징이 있으나 집단응집력, 모방행동 등을 통한 기법이 다른 점이다. 설교를 상담기법으로 하되, 청중전체의 공통된 정서와 더불어 개인의 특이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전자와 후자를 자료로 삼아 성경의 Context와 Text를 사용할 수 있다.

설교자가 목회상담적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세들이 있다. 1)설교자의 자기노출(Self-Disclosure)을 적절히 하라 2)대화하듯 하라 3)청중과 개인의 삶의 자리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라 4)정신분석학과 상담적 지식을 성경에 적용하라 5)청중 앞에서 한 사람과 얘기하듯 하라 6)설교시 가끔 질문을 던지라. 이때 청중이 생각할 수 있도록 몇초간 침묵하라. 반드시 답을 들을 필요는 없다. 필자는 시애틀 전역에 있는 교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설문에 응한 피면접자들 중에 과반수 이상이 목회상담적 설교를 원하고 있었다.

다시말해 지시형보다는 상담형 설교를 더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피면접자들의 선호가 반드시 설교의 이상적 모델이란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들의 선호도를 파악하여 청중의 Need를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필자의 역점은 성경이 지시적이고 일방적인 메시지와 함께 목회상담적 설교에도 비중을 많이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설교가 설교자의 기호성향이나 청중의 선호도와는 상관없이 성경적 설교의 패턴을 적용해 청중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하고 상처로 인한 정서적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기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교회되게 할 것이다.

“부활신앙과 삶”

금년 부활절 예배는 여느 때와는 달리 쓸쓸한 분위기이다. COVID-19로 인해 교회 예배와 축제, 행사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부활절은 성탄절 버금가는 기독교인의 명절 아닌가. 명절 치고는 너무나 조용하고 한적하다. 그래도 부활절에 대한 신앙이 환경에 따라 변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COVID-19로 인한 적막함과 암울함이 부활신앙의 진정한 의미와 열매를 품을 수 있다고 본다.

“예수 다시 사셨네”라는 신앙인의 외침은 부활절 예배와 행사, 그리고 평상시에도 늘 고백되어지는 신앙의 머릿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신앙인에게 ‘세상을 이김’과 소망이 있음을 얼마나 믿어왔던가. 어떤 공포 속에서도 감사와 환의, 평안을 갖는다는 이 믿음은 기독교인만이 소유할 수 있는 보화이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도 다시 살리심을 믿기 때문이다.

필자는 부활신앙이 어둠과 암울함 속에서 그 진가가 더욱 빛날 것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오히려 진동 가운데 진동치 않는 삶을 보인다. 세상이 진동할 수록 그 믿음의 힘의 모습이 더욱 드러나기 때문이다. 촛불이 어두울수록 그 빛이 더 발하듯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때로 신앙인의 환경이 흔들려야만 한다(히12:27).  결국 하나님이 그 분의 나라를 확고히 세우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현주소에 편안 대신 불편함을, 질서 대신 무질서를, 행복 대신 불행을 도구로 삼으실 수 있다.

만사형통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은 아니다. 만사가 가끔 뒤틀려야 한다. 이 세상의 삶이 순조롭거나 재앙이 속히 멈추는 것만이 신앙인의 기도가 되서는 안된다.  신앙인이 진동 속에서 영적 삶을 깊이 터득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은 얼마나 고귀하면서 소망있는 믿음인가.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신앙인의 부활신앙은 미래지향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약 미래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그것은 부활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에 있어서 부분부정은 전체부정을 뜻하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은 현재의 삶에 더 중요한 요소로 남는다. 이미 구원받았듯이 우리는 지금 부활된 삶을 살아야 한다. 부활신앙을 제대로 경험한 신앙인은 현재를 미래처럼 살 수 있다. 부활된 경험과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그 변화된 인성과 행동으로 안일하고 편안 자리가 아니라, 고난과 힘든 장소를 자원한다. 왜냐하면 그 삶의 자리가  부활의 열매를 더 빛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거듭남은 혼돈과 환난 속에서 그 힘을 더욱 발휘하기에 체질적으로 높고 잘 되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 부활신앙이란  “우리 몸도 부활할 것”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된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데에 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졌다면,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라. 요즘 같은 재앙의 시대에도 의연한 삶의 태도를 보이라.  남들이 출구만 찾고 있을 때 터널 속에서 그 의미와 삶의 진정성을 보이라. 문제해결만 찾으려 하지말고  문제 속에서 이미 해답이 있음을 인지하라. 왜냐하면 신앙인은 미래지향적이면서도 현재의 완성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온대로 어느 경우이든 자족하며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요셉이 애굽의 감옥에 있으면서도 형통했다고 전한다(창39:23).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이란 단지 행복하고 잘 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형통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부활절을 기념하며 감사하는가. 그래서 신앙인 모두는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될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이미 부활된 것처럼 살라.

상식이 영성이다

COVID19 사태로 전세계가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선책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면역력을 키우는 일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각종 모임이나 종교모임 등을 자제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교회들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전례없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교회들마다 안모이기 운동을 하자니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교회가 모이지 못하면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기에 일부 교단 책임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경우에도 교회는 현장 예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는 이들이 있다. 정부의 종교탄압을 운운하며 역사상 그 어떤 핍박과 시련에도 교회 예배를 준수한 전통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교회를 탄압할 목적으로 정부가 예배를 훼방한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교회예배를 사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바이러스 감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전 인류의 염원이라면 교회는 그 구실을 다 해야 한다. 그 구실이란 이웃과 인류의 복지를 위한 희생이다. 교회가 모이지 못하여 결속의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번 경우는 매우 특별한 정황으로서 교회가 거리두기 실천에 앞장 서야 한다. 교회는 흩어져도 교회이다. 세상이 교회를 상식적이지 못하다고 여길 때 오히려 복음이 가려지며 교회의 기능을 잃고 세상과의 접촉점을 상실한다. 교회가 현장예배를 고집하다가 바이러스 감염원이 된다면 이것은 교회가 사회에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를 끼치는 결과를 낳는 것 아닌가.

교회와 복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영적 구원과 삶을 토대로 하고 있다. 신앙인이 현장 예배를 사수하고 교회를 지키는 사명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복음,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삶 속에는 지극히 세상 눈 높이에 있는 상식적인 교차점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와 세상의 상식은 영과 육, 생명과 사망의 높은 담을 사이에 두고 있슴과 동시에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은 초월적이고 비상식적인 영역이면서도 그 신비한 영적 세계를 이 땅의 상식적인 삶으로 보여주신 데에 있다. 그리스도의 이웃 사랑과 박애정신, 작은 소자에 대한 관심, 무례함이 없는 행동 등은 그 신비한 영적 사역을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영성은 상식에서 온다고 믿는다. 상식적 윤리를 어김으로써 영적이고 신비성있는 하나님의 뜻을 어길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은 신앙인들이 잊고 있는 것 같다.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상식적 삶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고 그것이 영성이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의 대형교회들의 세습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필자의 견해는 얼마든지 세습이든, 승계이든 그 교회가 결정했다면 그 자체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교회 성도들이 다수결로 원하고 그것이 그 교회의 화평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 어느 누가 반대할 자격이 있겠는가. 세습을 목사 부자의 탐욕에서 비롯되었던 아니든 간에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느냐의 문제이다. 세습을 원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시고 그 교회의 권한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세습교회의 치명적인 실수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교회나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흠 없는 믿음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세습교회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교회들의 순결성 이미지가 낙후되고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가. 마치 그 모습은 대기업의 재산과 권력 상속이나 독재정권의 형상으로 비신앙인들에게 비춰지고 복음과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을 거스리고 있지 않은가. 성경은 아무리 믿음으로 가한 행동이라도 불가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시장에서 파는 음식과 제물은 신앙인이 얼마든지 믿음으로 먹을 수 있으나 불신자들의 비방을 받는 상황에서는 먹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양심이 우리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고 못 박기 때문이다(고후10장).

결론적으로는 세습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오용하고 세상으로부터 비방받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엄격히 그것은 믿음의 상식에서 벗어난, 하나님 앞에서 영적 죄악인 것이다. 필자가 참으로 통탄하는 것은 영적인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 은사와 기도에 열심을 다하는 성도들 중에는 전혀 상식적이지 못한 행동을 이웃에게 거침없이 보이는 경우이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인가.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가. 그렇다면 말과 행동을 상식적으로 하라. 이웃에게 예의를 지키라. 남을 존중하고 타인의 견해를 묵살하지 말라. 모든 일에 본이 되며 겸손하라. 세상 정치와 사회적 현상에 대해 지혜롭게 분별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내 주장도 말하되, 상대방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이라. 상식을 지킴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라. 이것이 영성이다.

“갈등과 화해”

인간관계 속에 갈등이 필연적으로 오는 것이라면 그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피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에 있다고 본다. 갈등이란 담론을 필자가 언급하는 이유는 제일 보편적이면서도 제일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갈등이 오는 이유는 반드시 인간의 과오나 죄성에서만은 아니다. 갈등의 이유에는 복잡하고 섬세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갈등도 많다. 또한 더 발전적이고 진정한 화해를 위한 갈등도 있다.

필자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갈등들을 긍정적인 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우선 가정이나 직장, 사회,교회생활에서 오는 많은 갈등을 피하려고 하면 더 많은 갈등을 낳을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갈등이 일어나면 그 자리를 피하려는 경향이 많다. 상대방과의 갈등을 피한다는 의미는 문제로 인한 갈등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채 자신 안의 갈등의 감정을 계속 품고 살겠다는 강력한 의지이다. 그 결과 갈등은 그 사람에게 파괴적인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가정이나 사회에서의 갈등의 현상들을 오랫동안 관찰하였다. 많은 경우가 갈등이 갈등을 자아내는 경우가 많았으며 갈등을 무조건 부정적인 요소로 보는 경향이 많이 있는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갈등을 단지 파괴적인 문제로만 인식하고 상대방의 무지와 일방적인 태도로만 치부해버리는 이유에서 였다. 갈등을 인간사회에서 있어서는 안될 사회악으로 본다는 것은 편견일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아무리 일어나지 말아야 할 부정적인 갈등이 있다하더라도 그 갈등을 오히려 화해를 위한 모티브로 삼는다면 우리 사회는 좀더 밝아지지 않을까 한다.

필자가 설파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당시 괴롭고 피하고 싶은 요소일지라도 말이다. 갈등이 없다면 참다운 화해가 무엇인지, 진정한 인생의 의미와 삶의 궁극적인 목적, 보다나은 인간관계 형성에 대해 무지하게 될 것이다. 원래 학문을 연구하는 목적이 무엇이던가. 질문을 갖기 위해서이다. 학문이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하여 질문으로 끝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갈등으로 시작하여 갈등으로 끝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과정에서 변증법적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 그 결과란 바로 화해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점차적인 화합과 이해, 새로운 것을 창출해나가는 묘미아니던가.

필자는 신앙인들에게 고하고 싶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등에서 시작하라. 신앙생활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고 했던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너무 무지하지 않던가. 성경을 평생 읽고 믿음생활을 40년 가까이 해온 필자도 하나님에 대한 갈등이 많이 있어왔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불신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 겪는 나의 무지함에 대한 갈등이었다.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무지를 느끼는 갈등은 곧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는 화해의 과정이다. 신앙에 있어서 갈등이 온다면 하나님의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먼저 갈등을 주셨다. 우리의 완악함과 죄에 대한 갈등을 심어주신 것이다.

무조건 믿고 보자는 것만이 믿음은 아니다. 그런 태도는 영적 태만이다. 하나님께 늘 질문을 던지라.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신앙적 자세이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늘 하나님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이들이며 하나님의 뜻과 화해한 사역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갈등을 통하여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그리고 갈등이 신앙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깨닫게 하신다. 무한하시고 흠이 없으신 성령이 지극히 유한하고 흠많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갖는 갈등이다. 그 갈등이 우리를 때로 괴롭게 하고 절망하게 만들지만, 곧 그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길임을 성경이 제시하지 않는가.

가정과 직장,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평생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사는데, 어찌 배우자, 직장동료, 교인들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갈등을 상대방에 대해 배우고 내 것을 내려놓으며 더나은 관계형성의 기회로 삼는다면 그 갈등은 화해를 위한 큰 자원이 될 뿐만 아니라 갈등 속에서도 미움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